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인용 결정은 예상대로였다. 탄핵소추안의 많은 부분이 탄핵의 요건이 될 수 없다는 설명으로 시작했지만 가장 마지막, 국정농단에 의한 국민주권주의 위배에 대해 엄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후의 대통령의 대응이 거짓(정규재 TV 인터뷰 등)과 불통(압수수색과 검찰 및 특검 조사 거부)으로 일관하고 있어 헌법을 수호할 의지가 없음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재판관의 보수, 진보 성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보수와 진보는 모두 헌법적 가치 아래에서 의미 있는 것이다. 헌법을 유린하는 것은 그 둘의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시작부터 헌법을 유린해왔다. 대통령 선거부터 이른바 셀프 감금사건으로 불리는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이 있었고, 당시 국정원장은 아직까지도 재판 중에 있다. 시작부터 헌법적 근본을 의심받은 것이다. 이후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으로 다시 한 번 국민을 유린했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에 대해서는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다. 참사 당시 청와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은 이 정부의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헌재는 탄핵 심판에서 이 정부가 생명권 보호 의무를 져버리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성실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탄핵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일 뿐이다(일부 재판관은 성실한 직책 수행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 했으나 이는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위법 행위는 아니라고 보충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에도 끊임없는 위헌 행위를 자행해왔다. 국정원은 해킹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내국인을 사찰했다는 의혹, 시대를 역행하는 국정 교과서 강행, 그리고 블랙리스트와 국정농단 까지.

위와 같은 사건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것은 4년전 우리가 예견했던 일이다. 그가 이미 독재자인 박정희의 딸이며, 그 이후에도 박정희를 위시하는 세력에 비호를 받으며 우리나라 제 1당의 지도자로 영도 되었던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으로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박정희라는 그의 핏줄이 주는 후광으로 지지를 받은 것이다. 이게 진정한 패권주의. 단지 박정희라는 이름의 권력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한 것이다. 친박 패권주의의 행패는 지난 총선에서 극에 달했다. 새누리당의 공천과정에서 단지 친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천과정을 방해했고, 그 결과 다수의 친박 세력이 당을 장악했다. 그리고 국민은 엄정한 심판을 내렸다. 새누리당은 총선에서 원내 제 2당으로 밀려날 수준으로 참패한 것이다.

이러한 패권주의에 갇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유신적 사고(思考)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 주권은 대통령의 권한 밑에 있다는 사고가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로서 국민 주권과 상관 없이 권력을 장악했던 인물이기에 이러한 사고가 있었을 수도 있다. 허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민의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국민의 주권이 있었기에 당선 되었음에도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시대착오적 인물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신적 사고에 머물러 있던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서는 모든 위헌적 행동이 자신에게는 선의였을 것이다. 애초에 사고 자체가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생각에 기반한 선의였던 것이다. 안 지사의 말대로 이러한 탄핵 사태가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가 문제였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고 자체가 문제였다. 유신 독재자의 딸은 결국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친박 패권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의 행동에도 이와 같은 시대착오적 사고가 나타난다. 태극기 집회의 정체성만 봐도 그러하다. 대통령을 지키는 것 만이 애국인 듯 착각하며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국민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에 한숨이 나올 뿐이다. 대통령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순수한 선의로 행동했을 뿐인데 하는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 한대로 유신적 사고 아래서 말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며, 스스로를 선동하는 모습이 유신적 사고, 그리고 지난 보수정권에서 창궐했던 일베적 사고이고 곧 친박 패권주의의 민낯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드디어 친박정희 패권주의를 물리칠 시대가 왔다. 국민의 주권이 확고히 인정받는 진정한 민주주의 혁명이라 말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에도 잔재하던 유신 잔재 세력을 말끔히 소탕할 기회가 온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역사적 흐름에 걸맞은 새로운 정권이 탄생해야 한다. 국민의 주권을 우선하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제대로 된 정권을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우연히 네이버 연예 기사를 통해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가 인터넷으로 개봉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촬영기간은 3일, 재밌게도 한국을 배경으로 배두나씨와 김주혁씨를 캐스팅 했더군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항상 챙겨보는 편입니다. 처음 그의 영화를 본 건 중학생때 일겁니다, 아마도. SBS에서 방영했었던 '러브레터'를 아주 푹 빠져 봤었던 기억이 납니다. 보통 영화관도 아니고 TV로 영화를 봤던 경험이 머릿속에 오래 기억되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러브레터'를 아주 빠져들어서 봤다는 기억은 생생합니다.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서 나란히 누워 자고 있고, 고요한 한 밤 중 그 옆에 저만 홀로 깨어 구식 브라운관 TV를 유심히 뚫어져라 보고 있는 장면이 사진처럼 머리에 남아있거든요. 가족들이 각자 방도 아니고 거실에 누워서 잤던걸 보니 이사온지 얼마 안된듯 합니다. 샷시도 없고, 새로산 침대도 아직 안들어와서 거실에 함께 누워 잤으니까요. 중학교 2학년때 이 집으로 이사왔으니 시기에 대한 기억은 확실할 겁니다, 아마도.

재밌는건 그때 '러브레터'를 본건 확실히 기억나는데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난다는 겁니다. 확실히 전혀 졸지 않고 정말 재밌게 봤다는 기분은 나는데요. 이와이 슌지 특유의 아름다운 화면과 서정적인 음악이 계절적 분위기와 어울려 한 밤 중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한창 사춘기였기에 그 감정은 더 풍부하게 다가왔을 지도요. 여튼 내용도 제대로 기억 안나는데도 아주 특별하고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게 된 여러 계기중 하나의 사례로 꼽을수도 있겠네요.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보게된 건 대학이후입니다. 그 때의 '러브레터'에 대한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에 늦가을 즈음 날씨가 쌀쌀함을 넘어 추워질 무렵 대학 기숙사에서 혼자 봤었습니다. 아직 더위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눈내리는 배경의 영화를 보기엔 뭔가 이상하니까요. 그리고 이후 그

의 주요 작품들은 거의 봤습니다. 하나와 앨리스, 4월 이야기,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릴리슈슈의 모든것, 립반윙클의 신부까지.

그의 작품은 완전히 밝거나 혹은 어둡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뉘는 경우가 있는데 전 밝은쪽의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밝은 영화에서 특히 이와이 슌지의 미적감각이 더 풍부하게 살아나는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특히 그의 영화에서 '따뜻한 빛'의 사용은 정말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마저 주곤합니다.


4월 이야기



러브레터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도 좋습니다.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영화지만 식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감정이 고조되는 그 부드러움 또한 좋습니다.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영화에선 일상의 복잡한 마음이 진정되고 감정이 해소되는 경험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챙겨보려 하는 편입니다.




'장옥의 편지'는 유투브의 '네슬레 시어터'라는 채널을 통해 개봉되었습니다. 아마도 커피를 만드는 네슬레 사에서 후원하는 채널이겠지요. 일본인을 주로 타겟으로 하는 채널로 보이는데 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든것 부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졌습니다.



영화는 15분에서 20분 가량의 4개의 이야기로 나눠져 있습니다. 내용은 한국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 또한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진 사회임에도 한국을 배경으로 한 것은, 한국과 일본의 동질감과 국가적 경계를 넘어 해결해야 할 공동의 문제를 일본인들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장옥의 편지'는 극중에서도 등장하는 소재지만, 극 밖으로 나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하는 편지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이러한 내용으로요.

"한국에서도 여성들은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소유물이 되고, 남편의 소유물이 되는 것 말이지요. 커피 한 잔의 여유라도 갖는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그러한 여성적 삶을 포기하고 며느리가 되고 아내가 되어라 합니다. 하지만 차츰 변하고 있어요. 가부장적인 사회는 점차 자기 반성을 통해 천천히 바뀌어 나가고 있습니다. 아직 직접적으로 사과의 말을 하지 못하고, 여성을 위한 도움이 아직 미숙하지만 그래도 차츰 더 바뀌어 나가겠지요. 일본은 어떠하신지요?"

사회적 이슈를 이야기하지만 그 것을 분노와 슬픔의 감정으로 연결시키기 보다는 희망과 즐거움으로 연결할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낍니다. 비록 짧은 영화였지만 이와이 슌지만의 서정적인 메시지와 그만의 영상을 느낀 즐거운 한 시간이었습니다. 조만간 또 그의 영화를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장옥의 편지: https://www.youtube.com/watch?v=nzNl9MJjUMU&list=PLA_eLxzJ5UOnR8TtfkG82n39EtkRlvQSg&index=1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발렌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해뜨는 나라의 공장>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이상 5권은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세트)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후와후와>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 이윤정 옮김 | 문학사상사

    (이상 2권은 서점에서 읽은 책)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추천한다.

 

왜 하루키의 에세이인가?

하루키가 세계적인 인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루키 신드롬은 이제 한물간 유행으로 여겨질 정도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작가이다. 단순히 하루키를 추천하는 것은 마치 웃긴 예능인을 추천해준다며 유재석을 언급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시시한 이야기일 것이다.



교보문고에 등록된 <노르웨이의 숲> 상품정보에 있는 저자 소개 부분이다. 에세이에 대한 짤막한 소개가 들어있긴 하나 전반적으로 그를 대표하는 건 소설이다. 아마 그를 추천하는 대부분 사람도 소설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은 그의 소설은 <1Q84>이다. 당시 하루키의 신작 발표로 나라가 떠들썩했기에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직접 알아보고자 읽었다. 세 권을 내리읽으면서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난해한 예술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그의 책을 찾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나는 그의 소설을 추천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저자 소개에 언급된 소설 만큼 많은 에세이도 발표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서점에서 우연히 여행에 관한 하루키의 책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를 접하고 그의 에세이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지난해 그의 에세이만 6권을 더 읽었다. 그의 에세이에는 소설에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하루키 팬에게는 딱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나와 같이 하루키의 소설만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에세이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는 신선한 경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라는 작가가 아닌 하루키의 에세이를 추천한다.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루키 에세이의 가장 큰 매력은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냥 소소한 재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미소 짓게 되고, 가끔은 소리 내서 깔깔거릴 수도 있는 재미를 그의 에세이에서 만날 수 있다. 예능이나 드라마로만 재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책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다른 매력은 여행이다. 하루키 에세이를 세 가지 테마로 분류한다면 일상, 재즈, 그리고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 여행에 관한 테마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루키가 속된말로 프로여행러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여행 경험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해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체류하고 유럽과 미국에 몇 년간 거주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만의 여행 방법은 나와 같은 여행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라는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이리저리 자유롭게 유랑하는 모습은 내가 하고 싶은 삶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꿈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꿈을 누군가가 대신 실현해주는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지막 매력은 긍정적이고 밝은 분위기다. 최근 다양한 힐링에세이류가 서점에 쏟아지고 있는데 오히려 직접적인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은 하루키의 에세이를 보면서 더 많은 위안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행을 통해 많은 문화를 경험한 덕분인지, 그의 에세이에서는 다양한 생각에 대한 넓은 관용을 보여주며 곤란해 보이는 상황에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는다. 그의 여행에세이에서는 현지에서 렌터카를 사용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다른 차를 받았음에도 끝에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름대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로 마무리 지어지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긍정적인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혹은 둔감한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 긍정적이고 넓은 이해심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듯하고, 나의 사소한 고민이 아닌 범인간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읽을까?

정말 읽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세트에 있는 책은 그가 잡지에 연재하면서 쓴 글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따라서 두-세장 정도에 하나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그와 단짝인 것처럼 보이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유쾌한 삽화도 이야기마다 꼭 하나씩 들어가 있다. 세계적인 소설가다운 간결하면서도 몰입력 있는 문체는 이 짧은 글을 더더욱 쉽게 만들어 준다.

특별한 깊은 교훈을 담는 책도 아니고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책도 아니다. 가볍게 읽으면 좋은 책이다. 머리 쓰지 않고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TV나 인터넷이 아니라 독서를 하고 싶다면 이만큼 좋은 책이 없다. , 깊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경우, 예를 들면 소란스러운 카페나 버스 또는 기차에서도 집중하려는 노력 없이도 쉽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나의 경우인데 어려운 책을 읽을 때 해독의 방법으로 하루키의 에세이를 사용했다. 책으로 인해 얻은 피로를 다른 활동으로 푸는 게 아니라 다시 책으로 해독하는 것이다. 나처럼 책을 많이 읽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책을 펴면 피로가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번갈아 읽기는 절대적인 독서량을 늘리기에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책에 흥미를 붙이고 싶은 사람, 여행 방법이나 그곳의 문화를 나열한 에세이가 아니라, 여행을 통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공감하고 싶은 여행광, 하루키의 소설이 아닌 색다른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독서광에게 하루키의 에세이를 추천한다.

 * 시작에 앞서.

  본래는 이보다 일찍, 더 여유롭게 글을 쓰려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동생이 같이 운영하는 미용실을 개업하면서, 그 가게에서 사용할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 있었기에 그동안 이 글쓰기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지만 공부를 겸하면서 개발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렸고 어제나 되어서야 완성 할 수 있었다.

  한해의 독서 생활을 정리하고 내년의 독서 계획과 다짐을 세우겠다는 목표로 시작한 글이기에 꼭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짧게나마 리뷰를 해보려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 생각의길

<유시민의 글쓰기특강> 유시민 | 생각의길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 메디치미디어

<대통령의 말하기> 윤태영 | 위즈덤하우스


  올해 주요 독서 테마 중 하나가 글쓰기가 된 이유는 하나의 책 때문이다. 그 책은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논리적인 유시민 작가의 모습을 보며 그 논리의 바탕이 되는 생각은 무엇인지 궁금했기에 이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책의 주제는 단순하다.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어 하고 싶은 놀이와 일, 사랑, 그리고 연대하며 살아라’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망각으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기보다, 죽음을 직시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라 이야기한다. 유시민 작가는 이 책에서 삶의 중요한 요소에 놀이, 일, 사랑에 연대를 더하며 진보적 가치에 대한 예찬도 동시에 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도 큰 차이가 없었기에 무덤덤했다. 단지 인상 깊었던 것은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유시민 작가가 보여주는 글쓰기 방식이다. 나는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 <어떻게 살 것인가>처럼 말끔하고 또렷하게 생각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경험은 물론 철학과 인문학, 통계 뿐 아니라 과학적 연구 결과를 동원하여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 하며 뚜렷한 주제를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에 매혹되었다. 이런 이유로 <유시민의 글쓰기특강>을 읽어 보게 되었고, 연말에는 대한민국의 리더십 실종을 목격하며 자신의 뚜렷한 생각을 갖고 표현했던 전임 대통령들의 글쓰기 방법을 이해하고자 <대통령의 말하기>, <대통령의 글쓰기>를 읽었다.


  이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좋은 글쓰기 방법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크게 보면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는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정확하고 논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라는 것은 결국 내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아주 뚜렷하고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멋있는 글을 써도 겉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두 번째로는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결국 노력할수록 느는 법이다. 많이 읽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독해력을 키우고,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한다. 많이 쓰는 것은 주제에 알맞은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쓸 수 있게 한다. 이를 위해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도 좋다.

  세 번째로는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논증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지양하고, 자신의 주제를 타인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충분한 논증을 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자를 고려하여 써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과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있어도 쉽게 읽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글도 결국 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말로서 표현해도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글을 만들어야 한다. 가급적 단문으로 표현하며, 한국어로 글을 작성한다면 외국어 번역투를 지양해야 한다. 중학생 수준의 독자가 읽는다고 가정하고 쉬운 문장을 써야 한다.

  위에 언급한 네가지 이 외에도 다양한 조언이 있으니 찾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세 책은 다른 작가가 조금씩 다른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기에 차이도 있다. <유시민의 글쓰기특강>은 일반적인 논리적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때문에 다양한 상황에서의 글쓰기에 대한 조언과 마음가짐도 이야기 하고, 논리적 글쓰기를 위한 추천도서도 포함하고 있다. 반면 뒤의 두 책은 대통령의 글쓰기, 즉 리더라는 특정 인물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내가 쓰는 블로그의 글은 취향이 맞지 않는 누군가를 고려하며 써야할 의무를 갖진 않는다. 하지만 대통령의 글쓰기라면 상황은 다르다. 리더 자신에게 관심이 없거나 혹은 반대적 입장을 가진 사람도 자신에게 주의 집중 시키고,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전달해야 한다. 때문에 뒤의 두 책에서는 그러한 방법과 관련된 노하우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차이에 유의하여 책을 선택하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시나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을 실감나게 전하는 감수성 있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멀다.


  이 네 권의 책을 읽으면서 많이 읽는 것 뿐 아니라 많이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이 책들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평소에 그리 많은 대화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 정작 중요할 때 표현력의 부족을 많이 느끼곤 한다. 내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험을 종종 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즉 나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이 블로그에서 많은 글을 써나갈 것이다. 일 년 뒤 이맘때 지금 내가 쓴 글을 돌아보며 성장해 있음을 느끼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2년 차 백수인 덕에 책을 꽤 많이 읽을 수 있었다. 작년에는 어영부영 취업 준비하다 책 몇 권 읽지 못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취업 활동대신 국비 교육과정에 들어갔었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학원이 꽤 먼 곳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통학 시간동안 책을 오래 읽을 수 있었다. 후반기에는 취업활동을 하긴 했으나 계속되는 탈락 소식에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책으로만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 좋아하는 게임도 손에 잘 안 잡히고 거실에 누워 멍하니 있을 때마다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은 독서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올해는 책을 꽤 많이 읽은 듯하다. 물론 시간이 아주 많이 여유로웠던 것 치고는 많이 못 읽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그냥 평소보다 많이 읽었다고 해두자.

 

  올해 읽은 책들은 아래와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 생각의길

<유시민의 글쓰기특강> 유시민 | 생각의길

<대통령의 말하기> 윤태영 | 위즈덤하우스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 메디치미디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발렌타인데이의 무말랭이>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해뜨는 나라의 공장> 무라카미 하루키 | 김난주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이상 5권은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세트)

<취미는 전시회 관람> 한정희 | 중앙북스

<미학 오디세이 세트> 진중권 | 휴머니스트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세트> 진중권 | 휴머니스트

<CODE: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숨어 있는 언어> 찰스 펫졸드 | 김현규 옮김 | 인사이트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 강정인, 김경희 옮김 | 까치

<코스모스> 칼 세이건 |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구매하지 않고 서점에서 읽은 책들

<후와후와>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옮김 |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무라카미 하루키 | 이윤정 옮김 | 문학사상사


  총 26권을 읽었다. 현재 읽고 있는 소설을 포함하면 12월이 끝나기 전에 한, 두 권은 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 글에는 ‘글쓰기, 하루키 에세이, 고전과 인문 교양, 소설’을 분류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사실 몇 주 전까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유럽 여행에 대한 기대는 가득하지만, 막상 준비하려니 너무나 귀찮았다. 그전까지 나에게 여행은 그저 출발 전날 기차 예약하고 버스카드 하나만 잘 챙기면 대충 옷가지 쑤셔 넣고 떠나도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국내 여행이 전부였기에 나올만한 당연한 불평이었다.

    준비 안 하냐는 어머니의 닦달에 못 이겨 하나하나씩 조사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다른 교통 환경과 숙박시설, 그리고 수많은 관광지가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속된말로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 괜히 혼자 유럽 여행한다고 깝댔나’,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게, 가서 미아 되고 영영 못 오는 거 아닐까?’ 하는 오만 망상이 들었다. 정말로 유럽은(혹은 여행은) 그 분위기를 한껏 느낌 있게 담은 사진을 통해 감상하는 것이 직접 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진은 여태껏 내가 가졌던 유럽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도 않을 것이고, 움직여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며, 그 나라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깨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정말로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여행의 기술>에 언급된 위스망스처럼상상력이 실제의 천박한 경험보다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한다는 의견에 순간 동의하기도 했다.

    이런 두려움과 긴장 탓에 여행 준비에 온 정신을 쏟기 어려웠다. 그저 필요한 짐을 챙기고 간략한 동선만 만든 것이 준비의 전부였다. 정작 여행에서 보게 될 것이 무엇이고, 지나가는 모든 것에 대한 더 많은 호기심을 제공할 유럽의 문화에 관한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긴장이 미리 오는지 이상하게 밥맛이 떨어졌다. 소화도 잘 안 되고 머리도 아파지고 그랬다. 간밤에는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온 정신을 마비시켰다. 그 때문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 즈음이 되어서야 얕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상하게도 어제의 두려움과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개운했고, 몇 주 내내 번갈아 날뛰었던 신경들도 잠잠해진 듯했다. 자포자기의 마음으로돈 아까우니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여객 터미널을 거치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은 그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에게 두려움을 안겨줬던 것들 - 즉 내가 도달하게 될 곳이 어떤 장소인지, 그리고 어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기대에 부응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론가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행동 그 자체가 나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정말 추웠던 지난 몇 달의 기억이 있는 이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그 어느 곳으로든 도달한다는 것이 행복이었다. 일상의 따분한 대학 생활에서 내가 타고 있는 버스가 경로를 이탈하여 어디론가 모르는 곳으로 도달한다면 즐겁지 않을까 하는 쾌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도착하는 그곳이 나에게 어떠한 행복과 실망을 안겨주든지 상관없다.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버스와 비행기, 그리고 머무는 여객터미널과 공항에서의 기억이 어쩌면 여행 중에 가장 행복한 기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 2014년 3월에 유럽여행을 떠나며 느낀 것을 다시 이곳에 옮겨 적는다. 볼 때마다 그때의 즐거운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래는 그 후 여행하며 떠나간 흔적들.




2. 부산

    바다가 보고싶었다.

    남쪽의 바다와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는 일도 흔치 않은데 바다를 못보고 가긴 좀 아쉽지 않은가. 어디로 갈까 하다가 역시나 떠오르는 한 곳, 부산.

3900원이면 부산 사상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 안에 사람은 서너명 남짓듬성듬성 앉아있었다. 저 안쪽에는 무슨 이유로 부산으로 가려 하는지 궁금증이 피어나게 만드는 여성의 머리 윗부분만 얼핏 보였다. 그는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메세지를 주고 받는 듯 누가 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심한 듯 하다. 난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안전벨트를 맸고, 버스는 출발했다.

 

    부산으로 향하는건 꽤 오랜만이다. 첫 부산에 대한 기억은 아마 초등학생 때일 것이다. 동생은 아직 초등학교 입학 전인듯,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마도 내가 9살 쯤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의 기억이 그렇듯 그 여행에서 내가 무엇을 했는지, 뭘 보았고 어디에 갔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부산에 갔었다는것만 확실히 인증해 줄 수 있는 인상 깊었던 한 장면만 기억날 뿐이다.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었고 야간 기차를 탔는지 부산역에 새벽 일찍 도착했다. 배는 고프고 아직 밖은 어둡고 날은 추웠다. 곧 해가 뜰 것 같은 시간이었다. 바다의 등대처럼 어둠이 짙게 깔린 역전의 광장을 은은히 밝히는 편의점이 우리 가족이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인듯 했다. 인기척 없는 거리를 바라보며 따뜻한 컵라면을 가족과 함께 나눠 먹었다어둠이 광장 사이사이의 골목으로 숨어 들어가고 밖이 점점 퍼렇게 변하는 걸 지켜 보았다. 이것이 부산에 대한 첫 기억이다. 왜 그 기억만 부산 여행에서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부산이라는 장소가 주는 인상 보다는 아마도 새벽 기차여행에 대한 기억, 어디론가 떠나는 행위와 평소에는 움직이지도 않을 특별한 시간에 한 행동 그 자체가 즐거웠을거라 생각한다. 짧게 말하면 그 때부터 이미 '여행한다는 것' 그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은 갔을 것이다, 아마도. 딱히 요즘의 잘나가는 20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에, 해운대에 완벽한 몸매를 가진 여자친구와 여행을 갈 일도 없었고, 친구들과 함께 헌팅을 하자며 해수욕장으로 떠날 일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일을 잘할 재능도, 흥미도 없고 받쳐줄 화술과 외모도 부족함은 물론이었다. 그냥 무슨 일에서인가 갔을것이다, 아마도. 그런 무슨 일에서 방문했던 기억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마지막 기억만 조금 남아있다. 2013년 여름. 두번째 내일로를 떠났을 때다첫 내일로 여행은 겨울에 혼자였었기에 이번 여름은 여럿과 함께 떠났었던 것이다. 남자 셋 여자 셋. 꽤 많은 인원의 여행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남녀 단둘이 여행을 가기엔 뭔가 어색할테고 2 2도 어색하긴 별반 차이 없었을거다. 8명은 너무 많으니, 그래서 타협한 인원이 6명이 아니었나 싶다. 동성끼리 여행 하고 싶었으면 애초에 거기다 글 올리지 않고 친구랑 갔을테니 그런 가정은 넘어가자. 네이버의 유명 내일로 카페에서 사람을 모아 여정을 세웠고 그 중에 부산이 있었다.

    한 여름에, 부산에, 남녀가, 쌍으로, 6명이, 며칠을, 함께.

    이렇게 보니 별 서술도 없는데 벌써 후끈거리는 상상이 펼쳐지는 듯 하다. 어딘가 낭만적이고, 은밀하고, 더 나아가 음란하기까지하다. 애석하게도 음란은 커녕 '낭만'의 앞글자 까지도 도달할 일이 없었다. 아마도 서로에게 느낀 첫 인상부터 예견된 결과였을거다여행을 시작한 의도에는 그런게 깔려있었을지 모르겠다만. 어느 시장의 맛집에서 밥을 먹고,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팥빙수를 나눠 먹고, 감천문화마을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야간의 해운대 바다에서 술을 마셔도 여행은 그닥 재밌지 않았다. 오히려 홀로일 때보다 더 외롭게 느껴졌다. 주변에는 연인들과 여름의 해운대를 만끽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난 왜 여기 한복판에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한 그녀들이 주위에 여성들에 비해 부족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만-물론 지나가는 특출난 몇몇 여성에게 눈돌아가기는 했다- 그 친구들이 해운대에서 내 앞에 앉아 있다고 한들 딱히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러자고 시작한 여행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홀로 여행하면서 가진 다양한 생각들을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며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에 여럿과 같이 여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여행을 하는 목적이 제각각임을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어떠한 장소에 방문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고, 누군가는 '내가, 지금, 이렇게, 산다.'고 이야기 해줄 사진을 남기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매일 밤 나누는 술자리는 내 지난번 남자친구가 어땠는지, 내가 일하는 곳은 어떠한지, 언제쯤 결혼할 건지에 대한 신변잡기 이야기였다. 난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냥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뿐이다. 우리가 지나온 역이 어떠한지, 기차에서 펼쳐진 풍경이 어떠했는지, 전라선과 경전선을 타며 느낀게 어떠한지(기차가 같은 기종이라 할지라도 분명 차이가 있다), 순천만의 갈대가 어떠하고, 여수의 낮과 밤의 차이가 어떠한지, 통영의 시내 교통의 복잡함과 소매물도의 아름다움은 어떠한지. 여행에서 내가 갖는 관심은 오로지 이런것 뿐이었다. 당연하게 그들과 내가 여행에서 갖는 공통 관심사가 점점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었고 그 절정에 나는 해운대에 앉아있었다. 차라리 그런 분위기의 부산엘 가지 말았었다면 괜찮았을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기억은 그렇게 씁쓸하게 잊혀지고 있다.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기억을 더듬다가 잠에 빠져 들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도 있고 꽤나 많이 걸어보며 움직인 탓도 있었던 듯 하다.

 

    사상 터미널 까지 대략 50분이 걸렸다. 마지막 부산 여행때도 사상 터미널에 왔었던게 잠깐 떠오른다. 1년 내로 결혼하고 싶다던 그 여자애들은 결혼이나 했나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처음에 탔을 때보다 꽤 많은 인원이 버스에서 내렸다.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한 저 깊숙히 앉아있던 그녀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바쁜 평일의 오후, 제각기 할 일을 위해 바삐 흩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만 특별히 가고자 하는 목적지도 없는 여행자였을 것이다

 

    번화가인 서면으로 향했다. 늦은 점심을 때우기도 필요했고, 이곳이 왜 유명한지 대략적으로 나마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혼자 밥 먹을만한 곳을 찾을겸 골목 골목을 들여다 보았다. 어떤 골목은 어느 번화가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밤 만되면 고기와 술과 사람으로 뒤엉켜 있을만한 곳도 있는가 하면서면역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면 소위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기 전에 사람들의 때가 덜 타고 아기자기함이 남아있는 음식점과 카페가 있는 골목도 볼 수 있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지역이라면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입니다. 크게 다를건 없네요. 물론 밤의 서면은 뭔가 또 다른 매력이 있을수도 있겠지.

 

    네 시쯤 된 늦은 점심을 맥주 한 잔과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 다음 일정을 어떻게 가져갈까 고민했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들어갈까아니면 집으로 돌아갈까? 하룻밤 묵고 갈 각오도 하고 내려왔지만 딱히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마음 내키는 일이 없었다. 내일도 머물고 간다면 할 만한 일은 해동용궁사에 가서 일출을 한 번 보고 싶고, 인문학 서점이라는 인디고 서원이란 곳에 방문해 보고 싶기도 하고, 부산 사람들도 자주 가지 않았을 만한 멋진 카페를 찾아 못다 본 책을 다 읽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같이 술 한잔 기울이며 가슴에 쌓아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족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지 못할 이야기를 차라리 처음보는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있을것 같았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시작한 여행이었기에 이 생각이 제일 간절했다. 취업하지 못한 내 넋두리를 들어주며 같이 공감할 친구도 필요했고, 올해 겪은 사건 사고를 이해해줄 멘토도 필요했다. 오히려 한 순간 만나고 잊혀질 사람일 수록 못다한 속내를 털어놓기가 쉬웠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에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 만한 장소는 없었다. 단지 우려되는 것은 화요일의 게스트하우스에 그렇게 말동무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사실 없을거라고 확신했다. 휴가철도 아닌 주중에 게스트하우스는 그냥 고요한 숙박업소일거라고 생각했다. 고요한 게스트하우스라면 그냥 집에 돌아가는 편이 나을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딱히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이곳 저곳을 누비다가 한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못다 읽은 책을 마무리 하려고 말이다. 구글에서 검색해서 간 곳이었는데 꽤나 분위기 좋은곳이다. 부산 앞 바다가 보이는 곳은 아니지만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수영만의 물의 흐름이 보이며, 센텀시티의 높은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강물에 비치는 그런 장소였다. 2층에 아늑한 공간이 있었다. 연인과 친구들이라면 오기 정말 좋은 장소인듯 했다. 조명은 아늑하고 바깥의 풍경은 확 트이게 잘 보이는 그런 장소였다. 카페에 커피 맛보러 가는 사람이 아닌지라 커피의 수준을 논하긴 어렵네요. 단지 아쉽다면 아늑한 조명은 다시 보면 어두운 조명이고, 날씨는 꽤 쌀쌀했는데 히터는 안나왔다. 그리고 노래는 조금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마디로 혼자 책읽으러 가기 좋은 장소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깁니다. 개인적으로 음악없는 카페를 찾고 싶은데 도저히 찾을 수 없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음악없는 카페를 하나쯤 알아두면 좋다고 이야기 했는데 우리나라에 그런 카페가 있는지 조차 궁금합니다. 아시는 분은 제보 바랍니다.

 

    두세시간 정도 꼬박 앉아서 책에만 몰두했던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했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일반 기차는 너무 늦으니까 마지막 ktx를 타고 돌아가려 했다. 근데 아직 하지 않은 마지막 일이 있었다. 부산에 온 목적이 있었다. 바다를 보는 것이다. 대략 30페이지 정도 남은 책을 덮고 카페를 나왔다. 광안대교가 보이는 바다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였다. 대양을 향해 나아가려는 수영만의 물결과 함께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만난 광안대교와 함께 펼쳐진 부산 앞바다. 사실 난 햇살이 바닷물에 비쳐 찰랑거리는 주간의 바다를 더 선호하지만 밤의 바다도 그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고 위로가 있다. 낮의 바다가 시선을 사로잡고 아름다움을 선사한다면, 밤의 바다는 미지의 어둠으로부터 몰려온 파도 소리가 귓가를 메워버리며 웅장함을 선사하고 때로는 공포감을 주기도 한다. 보이지 않기에 더욱 웅장한것이다. 이런 바다 앞에서 거역할 수 없는 한낱 인간이기에 느끼는 위로같은게 있다.

    여름이었다면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바닷바람을 맞으며 술판을 벌렸을 것 같은 공간도 이제 다가올 추위에 맞서 마지막 바다의 정취를 즐기려는 몇몇 학생들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부산 싸나이 둘이서 맥주를 기울이는 모습도 있고, 아직도 헌팅을 하는 시즌이 안 지난건지 알콩달콩함을 즐기는 듯한 4명의 선남선녀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회 한접시 시켜놓고 왁자지껄한 수다를 나누는 여학생 셋, 그리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로 고독을 즐기는 분위기 있는 여자 한 명. 생각 외로 이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찾아 즐기고 있었다. 나도 홀로 고독을 씹는 그녀처럼 바다옆 가로등 밑에 앉아 술과 함께 이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즐거울뻔 했다는 아쉬움도 들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 해 볼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에 빠져보기도 한다. 내년에, 내년에 이곳에 찾아와 해볼 것이라 다짐해 본다. 부산에 오기 위한 이유를 남겨두고 떠나는 것도 어쩌면 여행지에 대한 예의일지 모른다. 모든 걸 다 보고 가져가려고 욕심 부릴수록, 오히려 느낌과 감각은 희미해지고 생각에서 빨리 잊혀지기 쉬운 법이리라.

 


    부산역에 도착하여 집에 가려고 보니 이제야 저녁을 먹지 않은게 떠올랐다. 그래서 맥주와 함께 먹으려고 오뎅가게에 들렀다. 몰랐는데 요즘은 오뎅가게도 파리바게트 마냥 다양한 종류의 오뎅을 파는걸 보고 놀랐다. 부산에만 있는건지 다른 지역에도 있는건지 모르겠다. 내 기억엔 이런걸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흠.

 

    마지막 ktx 출발 시각보다 30분이나 일찍 열차에 탑승했다. 부산역에서 마지막 ktx를 타는 느낌은 다른 열차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라면 좌석 대부분이 차 있고 북적거림이 있었을텐데, 반대로 부산에서 출발하는 열차에는 조용한 안정감만이 느껴졌다. 이렇게 고요한 느낌의 열차는 처음이었다. 예매할 때 사람이 별로 없음을 알고 일부러 가족석에 자리를 잡았다. 나 혼자 ktx 객차 하나를 전세 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출발하기 전 기차의 엔진으로 인해 발생하는 기분좋은 웅웅거림, 진동. 부산이라는 도시, 한국이라는 이 사회와 격리된 어떤 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막아주는 안전하고 아늑한 캡슐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작은 진동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아주 큰 고요함으로 둘러싸인 장소. 어쩌면 매번 여행을 할 때마다 내가 가장 찾아 헤메는 그런 장소가 바로 이런 곳 아니었을까 싶다. 그 누구도 없는 곳이지만 그럼에도 두려움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그런 아늑한 곳.

    이런 느낌을 받은적이 과거에도 있었다. 14년 봄.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그리고 오스트리아 빈의 밤거리를 헤메던 때가 가장 그랬다. 말하나 통하지 않는, 그런 어쩌면 가장 위험한 장소였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난 대단히 큰 위로를 받았다. 졸업을 앞둔 스트레스는 지구 반대편 대한민국에 있는 또 다른 나의 걱정일 뿐인듯 싶었고, 빈의 길거리위에 서있는 나는 그와 다른 사람인 것 처럼 느껴졌다. 마치 오래 전부터 유럽에 살아왔었던것 같고 이곳이 세상에서 걱정없는 유일한 장소처럼 느껴졌었다. 매일매일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밤마다 홀로 또는 누군가와 함께 와인을 기울이며 아무 걱정 없이 여행을 다니던 그때. 홀로 다닌 여행의 외로움 만큼이나 여행 내내 함께 했던 것이 그런 안도감이었다. 내일 어떤 여행지를 가게 될지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 하는 걱정은 대한민국에 있는 내가 졸업 후 어떻게 사회 진로를 이어나갈지 하는 걱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런 행복감을 여행하는 중간에 느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때를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게 아니라, 빈의 도심에 있으면서 바로 느낄 수 있었던게 제일 큰 행복이었다. 그런 행복을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사소한 곳에서 느낄 수 있었던건 의외의 수확이었다.

  



* 빈에서 느낀 기분을 제대로 표현한 사진이 없다. 사실 그날 밤에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진에 그 느낌이 담길리 없잖습니까. 그냥 그 느낌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위의 두 사진에서 동질감을 느낄수 있으신가요. 혹은 비슷한 또 다른 경험이 있으신가요.



    덕분에 이곳에서 즐겁게 책에 또 빠져들수 있었다. 몇페이지 남지 않은 <대통령의 말하기>를 다 읽었고, 하나 더 가져온 하루키의 에세이도 조금 읽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샀던 아직도 반의 반도 못쓴 공책에 오늘의 생각을 옮겨 적을만한 사색도 할 수 있었다. 기술이 너무 발달해서 부산에서 천안까지 겨우 2시간 밖에 안걸린다는게 아쉬울 정도로 이 느낌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천안아산역에 닿았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짧지 않은 추억을 돌아보고 그 만큼의 여행을 더 한 것 같았다. 이 깊은 시련이 끝나고 다음 여행에는 좀더 밝은 기억을 꺼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1. 봉하로 향하는 길

    여행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최근 2년간 이렇다 할 여행을 하지 못했다. 여행을 하기에 금전적 여유도 없었고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누릴 공간이 부족했다, 시간은 많은데 말이다. 이러한 욕구불만이 쌓이다 보니 종종 불면을 겪기도 했다. 대학생활 내내 나는 불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백수라는 신분은 사람을 아주 쉽게 변화시켰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미칠것 같은 마음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두고 살았다.

    지난 목요일이었던가 <무현, 두 도시 이야기>를 보고 문득 봉하마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과 맞물려 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도 지금이 최적기인듯 했다. 여행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노무현', 다른 하나는 '독서'.  영화를 보고 그가 궁금해졌고, 최근의 정치 현실을 보며 또다시 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책을 읽기에 너무 좋은 계절이기도 했고, 시험을 앞둔 학생이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와 토론을 재밌어 하는것 처럼 취직하기 싫은 백수가 자기소개서 대신 독서에 재미를 붙인 꼴이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당일치기 여행을 기획한 만큼 여행을 위해 크게 준비할 것은 없었다. 물론 내 여행은 항상 즉흥적이었기 때문에 어디에선가 하루 묵게 될 수도 있다는것을 염두에 두지만 최대한 움직임에 제약이 없도록 가볍게 가려 했다. 가장 중요하게 준비한건 노무현에 관한 책이었다. 어떤 책을 준비할까 생각하다 현 대통령과 가장 비교되는 그의 글과 말에 대해 이야기한 책을 사려했다. 원래는 <대통령의 글쓰기>를 사려 했으나 재고가 없는 통에 대신 <대통령의 말하기>라는 책을 구입했다.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결국 말하기든 글쓰기든 그것을 가치있게 만드는건 그걸 만드는 사람의 생각이니까. 이 책과 요즘 가장 재밌게 읽고 있는 하루키의 에세이 중 하나인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도 함께 챙겼다. 최근의 독서 패턴이 어려운 책을 독파하다가 중간중간 가벼운 책으로 머리를 식히는 식인데, 그러한 책에 가장 부합하는게 이 하루키의 에세이었다. 그의 소설은 그닥 나에게 별로 와닿지 않는 반면 그의 에세이는 정말로 재밌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그의 놀라운 표현력이 나를 매료시켰다. 이 글을 보는 독자중에서 주말의 나른한 오후에 카페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느낌으로 읽을 만한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에세이를 강력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 수건 하나 팬티하나 챙기고 이것으로 준비 끝.



    화요일엔 비 예보가 있었다. 어머니는 굳이 비오는데 여행을 가냐고했다. 머리 시릴정도로 가을의 파란 하늘을 보는것도 좋지만 비가 내리는 풍경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가을비는 내 여행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차의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독서에 집중력을 높이기도 했고, 비오는 시골이 일말의 소음마저도 차단시켜 연출하는 고요한 풍경을 보는 것도 좋았다. 아쉽게도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가 올 낌새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천안아산역에서 동대구를 거쳐 진영역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더 일찍 진영역에 도달하는 열차도 있지만 그러다간 열차안에서 진영역에 도착할때까지 모두 꿀잠으로 때워버릴것 같았기 때문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컨디션이 좋을 만한 시간을 택했다. 의외로 출근시간을 넘긴 시각의 ktx열차였지만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서울로 향하는 상행선 열차만 탔기 때문에 천안 아래로 내려가는 열차를 오랜만에 타는바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 앉아 ktx좌석의 편안함을 조금 느꼈다가 책을 꺼내 읽어내려갔다. 변화하는 바깥 풍경과 약간의 소음, 편안한 좌석,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신경 쓰는듯 안쓰는 듯한 주변 사람의 시선. 사람마다 최적의 독서환경이 제각각이겠지만 난 이러한 환경에서 매우 쉽게 책에 몰입할 수 있었다. 잠시 눈이 아파오거나 집중이 흐트러질 때쯤 시시각각 변화는 바깥 풍경을 보며 머리를 비우고 다시 책에 빠져들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못먹은 아침을 때우기 위해 용우동이라는 가게에서 튀김우동을 시켜 먹었다. 맛은 그냥 그저 그랬다. 분명 그 옛날 언젠가 역안에서 먹었던 우동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는데, 아동기의 기억을 넘어 청소년기 이후의 기억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맛의 우동을 먹어본 적이 없는듯 하다. 대전역 이었던가 분명 맛있었던 우동이 있었던거 같은데 말이다. 그 우동들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이 가게 다음에는 올 일이 없지 않을까 싶다.




    다시 진영으로 향했다. 경부선 열차에 비해 확실히 적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각에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젊은 부부인듯한 커플도 보이고, 샐러리맨 처럼 보이는 사람도 보이고 나이드신 어르신, 공군 군복을 입고 있는 군인도 보였다. 도시에서 내릴것 같은 샐러리맨은 들어보지도 못한 역에서 내렸고, 선글라스를 낀 젊은 부부는 여행지가 아닌 듯 한 곳에서 내렸다. 흠 사실은 내가 잘 모르는 여행지 들이 여기 근처에 많을지도. 그런 생각과 함께 책도 함께 읽다보니 금세 진영역에 닿았다. 진영역은 읍내에서 적잖이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승객들이 대중교통을 기다리기 보다는 마중나온 지인들의 차를 타고 하나 둘씩 빠르게 떠나고 있었다. 나 처럼 여행을 위해 이곳에 도착한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봉하마을로 가는 노선은 10번버스가 유일했고 12시 10분에 출발한다기에 그 사이 역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역 구석에 '화포천 아우름길'이라는 수상한 길을 발견했다. 자세히 가서 살펴보니 화포천 주위를 산책하는 코스인 듯 했다. 그리고 코스 중간에 목표로 하는 봉하마을이 있었다. 걷는걸 좋아하는 나이기도 하고 좋은 풍광을 둘러보며 가을 정취를 맞는것 만큼 좋은 경험은 없기에 한 줌의 미련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들어온지 10분만에 다시 뒤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조금 가다 보니 이게 관광코스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명확한 길이 없었고, 우측 길에는 공사중인 포크레인과 공사 현장 건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헤메다가 시간 낭비하는건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미련없이 뒤로 돌아왔다. 아직 코스가 다 완성된건 아닌 듯 했다. 완성되면 누군가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나저나 역에 도착해보니 12시 15분이었다. 앞선 버스는 놓쳐버렸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 시간표를 확인했다. '다음 버스 13시 40분'...음?

    미련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번화하지 않은 시 외곽지역의 택시들이 늘 그렇지만 진짜 눈물나게 비쌌다. 기본요금은 3900원에서 시작했고 복합구간이라 140원씩 미터기가 올라갔다.(참고로 천안시내 기본요금은 2800원이다. 새벽 할증을 해도 3380원) 매번 이런지역에서 택시를 탈 때마다 택시 기사들에게 왜 여기는 이런 요금이 책정되는지 묻곤 하지만, 어차피 이 지역의 상황을 잘 모르는지라 들어도 이해를 못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저 아까운것. 진영역에서 봉하마을까지 요금 7680원.




    아무래도 주중이다 보니 젊은 개인단위 관광객보다 나이드신 단체 관광객이나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았다. 혼자 여행온 이는 나 뿐인 듯 했다. 사실 사람이 거의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원래 이렇게 방문하는 사람이 많았던 건지, 최근 개봉한 영화의 영향인지, 아니면 지금의 나라 현실을 보며 노무현이 떠오른게 나뿐이 아니었던 건지 새삼 궁금해진다.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묘지와 노무현 추모의 집이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마을의 바로 옆에 관련 장소들이 모두 있었다. 아니 봉하마을과 노무현이 함께 하고 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한듯 하다. 한 장소에서 노무현의 묘역도 보이고 생가도 보이고 추모의 집도 보이고,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봉화산의 부엉이 바위까지 한눈에 보일 정도로 작디 작은 마을이었다.


    나는 마을 입구에서 국화꽃을 사들고 노무현의 묘역으로 향했다. 그의 묘역으로 향하던 나의 마음은 매우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서거하고 전 국민의 애도 물결에 빠져있고 모두들 그의 분향소를 찾아 죽음에 대해 한 마디 씩 하고 있을때, 나는 사실 그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고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나의 대통령이던 시절은 내 머리가 아직 완전히 크지 않았던 중고등학생 시절이었고 정치적 현안에 대해 큰 관심이 없을 때였다. 그가 어떠한 정치 역경을 겪어왔고, 어떠한 국민의 지지로 당선이 되었는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없던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에 대해 반신반의했고 결국 그 애도 물결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노무현이 죽고 7년이 흐르는 동안 새누리당 치하의 대한민국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현실의 연속이었다. 학창시절에 배운 국가의 역할과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믿음, 민주주의의 가치에 관해 혼란이 올만한 사건들을 20대 대부분 기간동안 숱하게 봐왔었다. 국민들은 정의롭지 않고 불 합리적이며 억압된 현상에서도 "경제 때문에, 안보 때문에" 묵인하며 살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배반되는 현실을 보고야 만 것이다. 정의가 무너진 국가는 경제도, 안보도 그 어떤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들만의 경제적 문제만 해결되고 그들만의 안보만 해결이 되었다. 때문에 그 어떤 대통령보다 정의를 중요시 했고 민주주의 가치 실현을 위한 가장 큰 목표를 국민과의 소통으로 삼았던 그가 다시 한 번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그의 죽음이 안타까워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를 그리워 할 수 있게된 것이다.






   그의 묘역의 입구에 올라서며, 바닥에 적힌 수많은 국민들의 글을 보고 국민들의 참여를 바라고 소통을 하려 부단히 노력했던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죽음까지도 국민과 함께 했던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나 중간에 놓인 헌화대 위에 국화꽃을 놀려 놓고 그의 유해가 묻혀있는 너럭바위에 다다랐다. 차마 이루 말할수 없는 슬픔이 밀려 올려왔다. 자신이 평생 지키고자 한 신념이 깨어질때의 자괴감, 평생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의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지... 너무 가슴이 아팠다. 더 이상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기 싫었던 것이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꾹 참았다. 진작에 울었어야 하는걸 이제와서 흘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이제 모든 국민이 알 것이다. 곧 다시 정의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이고, 더 이상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슬퍼할 필요도 없이 그의 노력에 감사하는 것으로 족한 세상이 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울지 않으려 했다.

    묘소 옆을 지나 부엉이바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청바지에 니트차림은 등산하기에 썩 적합한 차림은 아니라 오르는데 약간 애를 먹긴했다. 부엉이 바위는 다른곳보다 높은 목책으로 막혀있었다. 부엉이 바위 위에서 아름다운 자신의 고향을 앞에 두고 떠나야 하는 그의 발걸음이 후련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겠지. 복잡한 마음이 자꾸 들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바로 내려왔다. 그리고 추모의 집으로 향했다.




    추모의 집은 아직 노무현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시설이 지어지지 않아 그를 기념하기 위한 간이 건물과 같은 곳이다. 마당에는 그의 정치인생에서 유명해진 말들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건물 한편에는 변호인, 정치인, 대통령, 자연인으로서의 노무현에 대한 동영상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이미 영화에서 많이 나온 동영상들을 다시 보며 울컥하기도 했다가 숙연해 지기도 했다. 반대편 시설로 옮겨가면 그의 일대기와 사진, 그리고 그의 유품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특별히 넓은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관람하는데 오래 걸리진 않는다. 얼른 제대로 된 기념건물이 지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생가와 묘역, 부엉이 바위 등산과 추모의 집을 둘러보는데 대략 두시간 반정도 소모한듯 했다. 이곳의 경치는 매우 아름다워서 하이킹 복장을 하고 봉화산 꼭대기에 오르거나 주변 하이킹 코스를 둘러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싶었다. 그가 왜 이 주변 자연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곳에 아름다운 인물이 깃들어 있었다. 한 번쯤은 꼭 들러 볼 만한 곳입니다. 국립현충원의 대통령들의 묘소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연과 국민친화적인 그의 삶을 이곳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실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언젠가 시간 되신다면 들러보세요. 아참 저처럼 버스를 놓치는 사람 있을지 몰라 버스 시간표도 찍어서 첨부해 봅니다.






    올때는 못탔지만 갈때는 10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진영역으로 가지는 않았다. 왔던길을 그대로 돌아가기엔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고 이대로 여행을 끝내긴 너무 아쉬우니까 말이다. 진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나는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