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몇 주 전까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유럽 여행에 대한 기대는 가득하지만, 막상 준비하려니 너무나 귀찮았다. 그전까지 나에게 여행은 그저 출발 전날 기차 예약하고 버스카드 하나만 잘 챙기면 대충 옷가지 쑤셔 넣고 떠나도 아무 문제가 없는 그런 것이었다. 국내 여행이 전부였기에 나올만한 당연한 불평이었다.

    준비 안 하냐는 어머니의 닦달에 못 이겨 하나하나씩 조사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다른 교통 환경과 숙박시설, 그리고 수많은 관광지가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속된말로 멘탈이 와르르 무너졌다. ‘, 괜히 혼자 유럽 여행한다고 깝댔나’,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 게, 가서 미아 되고 영영 못 오는 거 아닐까?’ 하는 오만 망상이 들었다. 정말로 유럽은(혹은 여행은) 그 분위기를 한껏 느낌 있게 담은 사진을 통해 감상하는 것이 직접 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진은 여태껏 내가 가졌던 유럽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도 않을 것이고, 움직여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며, 그 나라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깨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정말로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여행의 기술>에 언급된 위스망스처럼상상력이 실제의 천박한 경험보다 더 나은 대체물을 제공한다는 의견에 순간 동의하기도 했다.

    이런 두려움과 긴장 탓에 여행 준비에 온 정신을 쏟기 어려웠다. 그저 필요한 짐을 챙기고 간략한 동선만 만든 것이 준비의 전부였다. 정작 여행에서 보게 될 것이 무엇이고, 지나가는 모든 것에 대한 더 많은 호기심을 제공할 유럽의 문화에 관한 공부는 거의 하지 못했다. 긴장이 미리 오는지 이상하게 밥맛이 떨어졌다. 소화도 잘 안 되고 머리도 아파지고 그랬다. 간밤에는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온 정신을 마비시켰다. 그 때문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 즈음이 되어서야 얕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상하게도 어제의 두려움과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몇 시간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왠지 모르게 개운했고, 몇 주 내내 번갈아 날뛰었던 신경들도 잠잠해진 듯했다. 자포자기의 마음으로돈 아까우니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 때문에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여객 터미널을 거치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은 그런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에게 두려움을 안겨줬던 것들 - 즉 내가 도달하게 될 곳이 어떤 장소인지, 그리고 어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던 기대에 부응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론가 미지의 곳으로 떠나는 행동 그 자체가 나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정말 추웠던 지난 몇 달의 기억이 있는 이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그 어느 곳으로든 도달한다는 것이 행복이었다. 일상의 따분한 대학 생활에서 내가 타고 있는 버스가 경로를 이탈하여 어디론가 모르는 곳으로 도달한다면 즐겁지 않을까 하는 쾌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도착하는 그곳이 나에게 어떠한 행복과 실망을 안겨주든지 상관없다.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버스와 비행기, 그리고 머무는 여객터미널과 공항에서의 기억이 어쩌면 여행 중에 가장 행복한 기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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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3월에 유럽여행을 떠나며 느낀 것을 다시 이곳에 옮겨 적는다. 볼 때마다 그때의 즐거운 긴장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래는 그 후 여행하며 떠나간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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